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카고 대학교 (문단 편집) === 시카고 대학교와 남미 ===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와 엮였던 역사가 존재한다. 피노체트는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군사독재에 협력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본거지인 시카고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독재 협력자들은 시카고 보이즈(the Chicago boys)라 불리기도 했다고.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자면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실권을 잡은 칠레 군인들은 사실 시카고학파들의 안건에 반대를 표시했었다. 칠레군은 사회정책을 통제했으며, 이는 1979년까지 칠레 시장 개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이로 인해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시카고 학파 출신 학자들에게 정부 요직을 주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물가를 잘 잡아내자 적극적으로 이들에게 정부 요직을 맡긴 것. 사실 시카고 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의 경우 칠레에서 사기업 초청으로 몇 번 강연하고 피노체트와 한 번 만나 짧은 독대를 나누면서 시장 자유화를 권유했던 게 칠레에서 했던 일의 끝이었다. 프리드먼은 이런 일을 중국과 소련에 대해서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흑역사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애초에 칠레(그리고 아르헨티나도)의 인재들이 시카고 대학교와 엮였던 데에는 아옌데나 피노체트와 직접 관계가 있어서 그랬다기보다 50년대 칠레 최고의 대학교인 [[칠레 교황청립 가톨릭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사이에 이루어진 교환 유학이 컸다. 그때 유학한 인재들이 때마침 피노체트 세대에 중역을 맡게 된 것이 크다. 또, 피노체트가 이들을 신임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 정부의 신임 역시 받았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피노체트식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민주화 세력도 인정하고 이것을 수용하려고 했다. 사실 피노체트 말엽과 민주 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칠레의 기적이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를 주로 민주화 세력이 끌고 나간 것을 보고서 민주화 세력도 독재 정권 못지 않은 추진력을 가지고 꾸준하게 경제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도 있다.] 거기에 더해, 이들이 있을 당시 칠레는 어찌되었던 1인당 소득이 남미 하위권이었던 시절[* 정확히는 1인당 gdp가 남미 평균의 절반이었다.]을 탈피하고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미 1인당 gdp 1위 수준으로 치고 올라갔다.[* 다만, 최근 들어서 우루과이가 1위로 치고 올라오긴 했다.] 최소한 이들은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한 축이라 볼 수 있다. 시카고 학파가 칠레 등지에서 활동한 것을 흑역사라고 한다면 박정희, 전두환 밑에서 봉직한 김재익이나 이른바 서강학파 같은 경제학자들도 폄하의 대상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